고용창출에도 기여, 정부 지원없이 이뤄내

‘배틀그라운드’ ‘리니지2 레볼루션’ 등 글로벌 히트작을 잇따라 배출한 국내 게임업체들이 지난해 6조원 가까운 수출 성과를 낸 것으로 집계됐다. 반도체, 자동차, 석유제품 등 주력 수출품목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효자 품목’으로 자리잡았다는 평가다.

지난 2일 게임업체들이 공시한 사업보고서에 따르면 한국의 ‘빅3’로 손꼽히는 넷마블, 넥슨, 엔씨소프트가 지난해 해외 시장에서 올린 매출은 3조2537억원에 이르는 것으로 나타났다. 업계에선 1만4000여 곳에 달하는 게임회사의 수출액을 모두 더하면 5조5000억~6조원에 달할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넷마블과 넥슨은 국내보다 해외에서 더 많은 매출을 올렸다. 넷마블의 해외 매출은 1조3180억원으로 전체 매출의 54%를 차지했다. ‘리니지2 레볼루션’이 일본을 비롯한 아시아 시장에서 인기를 끌었고 작년 11월 출시된 북미 시장에서도 좋은 실적을 내고 있다.

넥슨은 총 매출의 66%인 1조5110억원을 해외 시장에서 거뒀다. 작년 중국 서비스 9주년을 맞은 ‘던전 앤 파이터’와 출시 16년차를 맞은 ‘메이플 스토리’의 장기 흥행이 큰 역할을 했다. 엔씨소프트의 해외 매출 비중은 24.1%(4247억원)로 다른 두 회사에 비해 다소 낮지만 대표작 ‘리니지M’이 작년 12월 해외 서비스를 시작한 것을 감안하면 올해는 비중이 오를 것으로 보인다.

중견 게임사들도 큰몫을 했다. 작년 3월 출시 이후 지난해 3000만 장가량 팔린 블루홀의 ‘배틀그라운드’는 판매량의 절반(약 4500억원)을 북미•유럽 시장에서 올렸다. 펄어비스의 PC 온라인 게임 ‘검은사막’도 지난해 매출 523억원 가운데 82.2%(430억원)를 북미, 유럽, 동남아시아 등 해외 시장에서 올렸다.

올해도 수출액 증가세는 지속될 전망이다. 주요 회사가 대작을 잇따라 내놓을 예정인 데다 중국 시장이 다시 열리면 수출 증가세가 배가될 것으로 보인다. 중국 정부는 사드(고고도 미사일방어체계)로 인한 갈등으로 작년 3월 이후 한국 게임회사에 신규 서비스 허가(판호)를 내주지 않고 있다.
또 지난해 모바일 게임 하나로 500억원 이상의 매출을 올린 펄어비스는 1년 새 직원을 두 배 이상 늘렸다. 주요 게임업체 채용 경쟁률은 수백 대 1에 달할 정도다. ‘일자리 효자’로 급성장한 게임업계 비결이 주목받고 있다. 한때 ‘사회악’으로 치부받던 게임업계는 이젠 막강한 고용 창출력을 자랑한다. 정부가 재정을 투입해 지원한 덕분일까. 물론 아니다.


■ 패러다임 시프트: 새 플랫폼•장르 개척하며 ‘엔터테인먼트 산업’ 도약


국내 게임산업의 성장은 각종 규제와 부정적 사회 인식을 넘어선 결과다. 1990년대에 세계 최초로 그래픽 기반 대규모 다중접속역할수행게임(MMORPG)인 ‘바람의 나라’와 ‘리니지’ 등을 내놓고 2000년대 초창기 고스톱과 포커 등 사행성 온라인 게임으로 인기를 끌기 시작했다. 하지만 학부모들의 싸늘한 시선 등으로 셧다운제가 도입(만 16세 미만 청소년은 밤 12시부터 오전 6시까지 인터넷 게임 이용 제한)되고 규제는 쌓여갔다. 게임업체들은 해외 시장을 공략하기 시작했다. 중국에 수출된 온라인 총쏘기 게임 ‘크로스파이어’의 동시 접속자가 800만 명을 넘기도 했다. 위정현 중앙대 경영학부 교수는 “스마트폰 이용자가 세계적으로 급증하면서 규제 없이 세계 어디서든 판매할 수 있는 모바일 게임 시장도 국내 업체의 주요 타깃이 됐다”고 설명했다. 지난해 매출 523억원을 기록한 게임업체 펄어비스의 북미•유럽•동남아시아 시장 매출 비중이 전체 80%에 달했다.


■  10년 내다보고 투자: 인공지능 등 선도적 R&D… 해외업체 M&A 활발


정보기술(IT)업계에서 가장 공격적인 투자를 하는 곳이 게임업체다. 지난해 매출 2조2987억원을 올린 넥슨은 인수합병(M&A)으로 성장한 대표적인 게임회사다. 2004년 온라인 게임 ‘메이플스토리’ 개발사 위젯, 2008년 ‘던전앤파이터’ 개발사 네오플, 2010년 ‘서든어택’ 개발사 게임하이(현 넥슨지티) 등을 인수했다. 지난해에는 미국의 캐주얼 게임 개발사 픽셀베리스튜디오를 사들였다.

넷마블도 지난 2일 미국 자회사 잼시티를 통해 콜롬비아의 모바일 게임사 브레인즈를 인수했다. 넷마블은 지난해 북미 게임사 카밤을 약 8000억원에 인수하는 등 지금까지 사들인 해외 게임업체가 모두 네 곳이다.

신성장동력 확보에도 돈을 아끼지 않는다. 엔씨소프트는 2011년 국내 기업 중 처음으로 인공지능(AI) 연구개발 전담 조직을 구축했다.

창업자인 김택진 대표가 직접 챙긴 AI 조직은 게임•스피치•비전•언어•지식 등 5개 연구팀(랩)에 100명 이상 규모로 커졌다. 한빛소프트는 게임에 특화된 가상화폐 브릴라이트 코인(BRC) 발행을 준비하고 있다.

게임업계 관계자는 “국내 게임업체들은 결국 세계시장에서 승부하기 위해 각종 투자를 끊임없이 하고 있다”며 “한국 시장이 좁기 때문에 선택할 수밖에 없는 전략”이라고 말했다. 이어 “문재인 정부가 추진하고 있는 내수를 통한 소득주도 성장으로는 일자리 늘리기에 한계가 있다는 방증이기도 하다”고 덧붙였다.


■ 성과 난 만큼 보상 : 히트작 나오면 수백억 스톡옵션… 우수인재 몰려


게임업계의 철저한 성과보상제도 결국에는 고용 창출의 주요 요인이다. 우수 인재를 확보해 좋은 게임을 내놓고 이는 매출 증가로 이어진다. 회사 덩치가 커지면 자연스레 고용도 늘어나게 마련이다.

펄어비스 직원 13명은 지난해 200억원대 스톡옵션 ‘잭팟’을 터뜨렸다. 이 회사 직원 13명은 지난 2일 총 45만2500주에 대한 주식매수선택권(스톡옵션)을 행사했다. 신주 11만 주를 받은 서용수 아트디렉터 총괄의 경우 이날 주식을 팔았다면 총 261억원 정도의 차익을 낼 수 있었던 규모다.

이 회사가 내놓은 게임 ‘검은사막’이 ‘대박’났기 때문이다.

엔씨소프트도 지난해 모바일 게임 ‘리니지M’이 성공하면서 전 직원에게 1인당 300만원의 성과급을 지급했다.

반면 문재인 정부는 성과에 따른 보상체계에 부정적인 태도다. 박근혜 정부에서 추진된 공공기관의 성공연봉제를 폐지했다. 게임업계 관계자는 “게임업계에서는 업무 성과와 상관없이 근무 연차에 따라 연봉이 책정되면 우수 인재를 절대로 유치할 수 없다”고 말했다.


■ 청년 맞춤형 직장 : 사내 수평문화•유연근무… 근무강도 높지만 선호


게임업체가 중소기업이지만 청년들의 선호 직장으로 꼽히는 것도 정부 고용 정책 실무자들이 눈여겨봐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청년 구직난과 중소기업의 구인난이 함께 발생하는 ‘잡 미스매칭’은 청년들이 중소기업을 기피하기 때문이라는 분석이다. 게임업계 관계자는 “대부분의 중소기업은 복지 혜택이 부족하고 고압적인 조직 문화 등으로 청년들이 꺼리고 있다”며 “반면 게임업체들은 서로 호칭을 ‘님’으로 부르는 등 사내 수평 문화에 근무 환경도 밝아 청년들이 찾고 있다”고 말했다. 정부가 대규모 재정을 쏟아내며 청년들에게 중소기업 취업 시 한시적으로 지원금과 세제 혜택을 주는 것보다 중소기업 근로 여건을 개선하는 것이 청년 구직난 해결에 더욱 도움이 된다는 지적이 많다.

자유로운 근무 시간도 게임업체의 강점이다. 근로자가 개인 여건에 따라 근무 시간과 형태를 조절할 수 있는 유연근무제는 게임회사 등 IT업계에서는 이미 보편화돼 있다. 위 교수는 “게임은 제작 과정에서 근무 시간이 밤낮이 바뀔 수도 있어 최대한 근로자가 노동 시간에 몰입할 수 있도록 돕고 있다”며 “문재인 정부가 추진하고 있는 일률적인 근로시간 단축이 게임 등 콘텐츠 생산업체에는 맞지 않다”고 말했다. 게임업계에서는 근무시간을 자율적으로 정할 수 있는 탄력근무제로 보완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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