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지수표로 모셔간다

글로벌 IT(정보기술) 기업들이 치열한 인공지능(AI) 인재 쟁탈전을 벌이고 있다. 국내 기업들도 마찬가지다. 자율주행차•스마트시티 등 4차 산업혁명 시대를 주도하기 위해서는 기반 기술인 AI를 선점해야 하기 때문이다. 미국 시장조사업체 IDC에 따르면 세계 AI 시장 규모는 2016년 80억달러(약 8조4800억원)에서 2022년 1132억달러(약 120조원)로 14배 이상 성장할 것으로 예상된다. 이에 구글•애플•삼성전자 등 IT 기업들은 경쟁사의 AI 부문 최고위 임원까지 수백만 달러 이상의 거금을 주고 서로 뺏고 빼앗기는 식의 스카우트 경쟁에 불을 붙인 상황이다. 인력 풀이 제한적이기 때문이다.

■ 구글 AI 개발 총괄은 애플로


지난 3일(현지 시각) 애플은 구글의 AI와 검색 기술 개발을 총괄했던 존 지안난드리아(Giannandrea) 부사장을 영입했다고 밝혔다. 지안난드리아 부사장은 구글의 AI 비서 서비스인 '구글 어시스턴트'와 검색, 이메일 등에 탑재된 AI 기술 개발을 총괄했다. 애플은 이번 영입을 통해 성능이 떨어진다는 평을 받는 자사의 AI 비서 서비스 '시리'의 성능을 대폭 끌어올릴 계획이다. 애플의 팀 쿡 최고경영자(CEO)는 "존 지안난드리아는 애플과 아이폰의 경쟁력을 끌어올려 줄 것"이라고 말했다. 페이스북과 구글도 AI 인재 영입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구글은 지난 2월 삼성전자에서 AI 비서 빅스비를 개발한 이인종 전 부사장을 영입했다. 이 전 부사장은 구글에서 자율주행차, 스마트폰, 스피커 등을 한꺼번에 연결해 관리하는 기술을 개발•총괄할 것으로 알려졌다. 페이스북은 지난달 루크 제틀모이어 워싱턴대 교수를 음성인식•AI 기술 담당으로, 마이크로소프트(MS)는 제프 고든 카네기멜론대 교수를 캐나다 몬트리올 AI 센터 책임자로 영입했다.

실리콘밸리의 최대 라이벌인 중국의 IT 기업들도 인재 쟁탈전에 공격적으로 나서고 있다. 중국 최대 포털 업체인 바이두는 작년 마이크로소프트에서 메신저•검색•AI 사업을 총괄해왔던 치루(齊魯) 부사장을 최고운영책임자(COO)로 데려왔다. 치루 COO는 바이두에서 AI•자율주행차 기술 개발을 총괄하고 있다. 바이두는 작년 자율주행차 소프트웨어인 아폴로를 공개하고, 세계 60여개 자동차•IT 업체들을 파트너로 끌어들였다. 중국 1위 전자상거래 업체인 알리바바도 작년 미국 아마존의 수석연구원으로 무인 매장인 '아마존 고(GO)' 개발에 참여했던 런샤오펑 박사를 영입했다. 알리바바는 런샤오펑 박사를 중심으로 중국에서 무인 매장 개발에 박차를 가할 것으로 전해졌다.


■ 한국 기업도 스카우트 경쟁


삼성전자•LG전자•네이버 등 한국 IT 기업들도 AI 인재 스카우트 경쟁에 나섰다. 삼성전자는 작년 11월 MS에서 AI 비서인 코타나를 개발했던 래리 헥(Heck) 박사를 삼성리서치아메리카(SRA)로 스카우트했다. 헥 박사는 MS와 야후, 구글 등을 거친 AI 석학으로 꼽힌다. 또 지난 2월에는 구글에서 AI•음성인식 연구를 했던 김찬우 박사도 상무급으로 영입했다. 지난달 22일부터 유럽•북미 출장길에 오른 이재용 부회장 역시 현지 AI 전문가들을 만나고 인재 영입도 타진한 것으로 전해졌다.

LG전자는 국내 경쟁사의 인재들을 대거 영입했다. 삼성에 인수된 자동차 전장부품 업체인 하만 최고기술책임자(CTO)였던 박일평 사장은 작년 LG전자에 합류해 CTO 자리에 올랐다. CTO 산하 인공지능연구소장으로는 김평철 전 NHN(현 네이버)의 CTO가 전무로 영입됐다. SK텔레콤은 지난 2월 애플에서 시리 개발을 담당했던 김윤 전무를 AI리서치센터장으로 영입했고, 2016년 말에는 삼성전자 종합기술원 출신인 김지원 상무를 스카우트했다. 네이버는 아예 작년 6월 프랑스 그르노블에 있는 제록스 유럽연구소(XRCE)를 약 1000억원에 인수해 버렸다. 이곳에 있는 80여명의 AI 전문 인재들을 한꺼번에 확보하기 위해서다.

네이버는 오는 12일 홍콩과학기술대에 30~40명 규모로 '네이버-홍콩과기대 AI 연구소'를 세우며 아시아 지역 AI 인재를 영입한다. 지난해 네이버랩스유럽 인수로 유럽 지역 AI 전문가 80여명을 확보한데 이은 것이다. 

김광현 네이버 서치앤클로바 리더는 "홍콩 연구소는 처음엔 30~40명 규모로 시작하지만, 연구소가 중국 경제특구인 선전과 가까워 앞으로 선전 내 기술 스타트업 인재들도 영입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네이버는 지난해 네이버랩스유럽 인수로 유럽 지역 AI 전문가 80여명을 확보했다. 국내에선 서치앤클로바 조직, 연구개발 자회사인 네이버랩스를 통해 인재를 상시 영입하고 있다.

카카오는 딥러닝 기술, 음악 정보검색 알고리즘, 음성 인식•합성 엔진을 개발할 AI 전문가를 뽑고 있다. 

넷마블은 지난달 IBM 왓슨 연구소 등에서 약 20년간 빅데이터, AI 관련 경험을 쌓은 이준영 박사를 AI센터의 수장으로 영입했다. 넷마블은 올해 북미에 AI 랩을 설립해 해외 인재도 영입할 계획이다.

넥슨은 150여명의 AI 기술 개발 조직인 인텔리전스랩스를 올해 말까지 300명 규모로 늘린다. 현재 인텔리전스랩스에서 근무할 개발자를 뽑고 있다. 100여명 규모의 AI센터•NLP(자연어처리)센터를 운영 중인 엔씨소프트는 지난달 말부터 AI를 기술을 활용해 다양한 모바일 서비스를 만들 개발자를 모집하기 시작했다.

기업들이 인재 확보 경쟁을 벌이는 배경에는 AI 인재의 수급 불균형이 있다. 캐나다의 AI 인력 분석 전문 업체인 엘리먼트AI는 현재 세계에서 AI 기술을 개발할 수 있는 박사급 인재 수는 2만2000여명이라고 분석했다. 이 중 구직 시장에 나와 있는 인재의 수는 3000여명에 불과하다는 것. 엘리먼트AI는 "현재 미국에서만 최소 1만명 이상의 박사급 AI 인재가 필요한 상황"이라면서 "앞으로 기업의 수요는 더욱 늘어날 것이기 때문에 인재 영입을 위해 들어가는 비용도 천정부지로 치솟을 것"이라고 밝혔다.

IT 업계에서는 AI 인재 쟁탈전은 앞으로 더욱 심화될 것으로 본다. 스마트폰, 자율주행차뿐만 아니라 세탁기, 냉장고, 조명 등 모든 제품에 AI가 탑재될 것이므로 이를 위한 인재 수요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IT 업계 관계자는 "기업에서 인정받은 AI 인재들은 다른 기업들의 영입 대상 '0순위'"라면서 "치열한 인재 쟁탈전이 계속 벌어질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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