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플 세계개발자콘퍼런스 2018

애플이 올해 초 야심 차게 인공지능(AI) 스피커 '홈팟(HomePod)'을 내놓았을 때, 홈팟의 핵심인 음성인식 비서 '시리'는 여러 명의 가족 구성원이 동시에 내는 사용자 목소리를 제대로 분간하지 못하면서 동작 오류(버깅)를 범하기 일쑤였다.


급기야 애플은 가성비 나쁜 홈팟의 발주를 출시 석 달 만에 줄이는 굴욕을 맛봤다. 월스트리트저널(WSJ)에서는 "음질은 최고지만 스마트 기능은 그렇지 않다(Super Sound, but Not Super Smart)"는 차가운 지적이 실렸다.


애플의 홈팟으로는 아마존이 '상대적으로 더 똑똑해 보이는' AI 비서 알렉사를 채용해 3년씩이나 먼저 내놓은 인공지능 스피커 '에코'를 당해내기는 애초부터 무리였다는 시장의 평가도 나왔다.


지난 4일(현지 시각) 미국 캘리포니아주 새너제이 매키너리 컨벤션센터. 애플 크레이그 페더리기 부사장이 아이폰의 '측정(measure)' 앱을 켜더니 탁자 위에 놓인 여행용 가방을 비추기 시작했다. 그가 가방의 한쪽 모서리와 다른 모서리를 비추며 화면을 차례로 터치하자 곧바로 59㎝라는 측정 결과가 나타났다. 이번에는 가방 속에서 손바닥만 한 액자를 꺼내 아이폰으로 비추자 곧바로 11×17㎝, 대각선 20㎝라는 결과가 나타났다. "증강현실(AR)을 이용해 측정한 겁니다. 멋지지 않나요?" 객석에서 환호성과 박수가 쏟아졌다.


                              진화한 시리를 발표하는 크레이그 페더리기  애플 부사장 애플홈페이지 캡쳐


애플이 전 세계 개발자들을 대상으로 개최한 '세계개발자콘퍼런스(WWDC) 2018'의 한 장면이다. 이날 애플은 올가을에 출시할 새 운영체제 'iOS12'에 적용한 새 기능들을 소개했다. 행사의 주요 키워드는 '생활 속에 들어온 증강현실과 인공지능'이었다. 프로그램 개발자를 대상으로 한 행사인 만큼 주로 소프트웨어(SW) 중심의 발표가 이뤄졌다. 다만 일부 애플 팬의 기대를 모았던 보급형 아이폰 제품 '아이폰SE2' 등 신제품 정보는 언급되지 않았다.


■ 생활 속으로 들어온 증강현실•인공지능


애플은 새 운영체제에서 사용자들의 실생활 속에 증강현실을 접목하는 데 중점을 뒀다. 지난 2016년 팀 쿡 최고경영자(CEO)가 "하루 세 끼 식사를 하는 것처럼 증강현실 경험은 일상의 일부분이 될 것"이라고 말한 것을 차근차근 실현하고 있는 것이다. 증강현실은 우리가 눈으로 보는 현실 세계에 3차원 가상 이미지를 덧씌워 보여주는 기술이다.


                                                애플 인공지능 스피커 스폿


증강현실 화면을 여러 명이 동시에 볼 수 있는 기능도 구현했다. 가상의 화면을 여러 명이 볼 수 있게 되면 실시간 게임이나 집 수리와 같은 공동 작업이 가능해진다. 이날 행사에서 애플은 두 명의 이용자가 각각 아이패드를 들고 증강현실 기반의 '새총싸움'을 하는 모습을 시연했다. 두 사람 사이에는 실제로 아무것도 없었지만 두 사람은 각자의 아이패드 화면에 나타난 나무토막들을 쓰러뜨리기 위해 열심히 새총을 쏘아댔다.


인공지능 비서 시리(Siri)도 한층 개선했다. 과거에는 "시리, ○○에게 문자 보내줘" "집에 전화 걸어줘"와 같은 단순한 동작만 가능했고 오류도 잦아 실제로 이용하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단 한 번의 명령으로 여러 개의 동작을 한꺼번에 수행하는 '숏컷(shortcut)' 기능을 추가했다.

 예를 들어 "시리, 나 집에 간다"고만 말하면 "여기서 집까지는 한 시간이 걸립니다. 아내에게 출발한다는 메시지를 보내겠습니다. 집에 도착하면 에어컨을 켜고 온도는 24도로 설정해놓겠습니다"라고 답하는 식이다. 사전에 아이폰 사용자가 회사•집의 위치와 이동수단, 문자 메시지 내용, 수신자, 집에 도착해서 조작할 기기와 방법 등을 설정해둔 것을 명령 한 번으로 이행하는 것이다.
올가을 iOS 12 체제가 안착하면 상황은 더욱 달라진다.


여행일정'이라고 한 마디만 내뱉으면 항공, 렌터카, 호텔 등이 줄줄이 업데이트돼서 동시에 앱이 구동될 수 있는 모바일 환경도 가능해진다는 얘기다.


비즈니스 인사이더는 "최근까지 아마존 알렉사의 스킬은 수만 가지로 늘어나 있다"면서 "하지만, 시리가 앱스토어에 있는 수백만 개의 앱을 모두 이용할 수 있게끔 능력을 갖춘다면 경쟁이 될 것"이라고 관측했다.


 이 매체는 "2010년 데뷔한 시리는 여전히 버깅이 심하고 한계선이 딱 그어진 음성인식 비서이지만, 동시에 한계를 뛰어넘을 가능성도 보여주고 있다"고 평가했다.


구글 어시스턴트, 아마존 알렉사 등 인공지능 비서 서비스 간 치열한 주도권 경쟁을 벌이는 가운데 애플이 보다 간편한 방식을 선보인 것이다. IT(정보기술) 기업 입장에서는 이용자가 많아야 더 많은 데이터를 확보해 인공지능을 지속적으로 고도화할 수 있다.


■ 속도 높이고, 커뮤니케이션 강화


오는 9월 아이폰 신제품에 탑재될 예정인 iOS12는 기존보다 속도를 높이고, 커뮤니케이션 기능을 강화한 것도 특징이다. 앱 실행 속도는 기존 운영체제보다 최대 2배 빨라지고 카메라 작동도 최대 70% 빨라졌다는 것이 애플의 설명이다. 애플은 2013년에 출시한 아이폰5s와 같은 구형 기종도 새 운영체제를 이용할 수 있다고 밝혔다.


지난해 아이폰X(텐)에서 처음 선보인 이모티콘 '애니모지'는 동물•만화 캐릭터의 얼굴로 사용자 표정을 따라했지만 이날 새롭게 선보인 '미모지(Memoji)'는 실제 사용자 얼굴과 비슷한 캐릭터를 만들어냈다. 삼성전자가 지난 3월 출시한 갤럭시S9 시리즈에 도입한 것과 비슷한 기능이다. 영상통화인 '페이스타임'은 기존 2명에서 한꺼번에 32명까지 통화가 가능하도록 개선했다. 스마트워치인 애플워치에는 사용자의 말을 잠깐 녹음해 곧바로 들려주는 워키토키 기능을 적용했다.


스마트폰 중독을 예방할 수 있는 '앱 리미츠(App Limits)' 기능도 탑재했다. 사용자 스스로 앱 사용제한 시간을 설정해 과도한 몰입을 차단하는 기능이다. 예를 들어 동영상 앱 유튜브 사용 시간을 1시간으로 설정하면 1시간이 지나는 순간 앱이 작동하지 않는다. 부득이하게 계속 앱을 써야 하면 '연장' 버튼을 눌러 사용 시간을 늘릴 수 있다. 잠자리에 들어야 할 시간에는 자녀의 스마트폰이 작동되지 않도록 부모가 설정할 수도 있다. 미국 IT전문 매체들은 "애플 주주들이 최근 애플 경영진에 과도한 아이폰 사용으로 인한 청소년 건강 우려를 전달했는데, 이 기능은 이에 대한 화답이라고 볼 수 있다"고 분석했다.


팀 쿡 최고경영자는 이날 기조연설에서 "지금까지 개발자들이 애플 앱스토어를 통해 벌어들인 돈은 1000억달러(약 107조원)가 넘는다"면서 "매주 5억명이 방문하는 앱스토어는 여러분의 창의성과 노력을 보상해줄 수 있는 최적의 장소"라고 참석한 개발자들을 독려했다. 이날 애플의 주가는 전날보다 0.84% 오른 191.83달러로 마감해 사상 최고치를 기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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