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여연대 등 12개 시민단체, 4개 기관 및 기업 20곳 고발...각종 규제로 AI 경쟁 못해

데이터 전문 기업 파수닷컴은 지난해 말 온라인 쇼핑몰과 병원, 금융기관 등 10여 곳과 추진하던 사업을 모두 중단했다. 파수닷컴은 의료와 신용카드 거래 기록 등 빅데이터에서 개인을 식별할 수 있는 정보만 골라 지우는 기술을 갖고 있다. 이 회사는 2016년 공공 정보를 상업적으로 활용하는 정부 가이드라인 발표 이후 고객사들이 큰 폭으로 증가하고 있었다.



하지만 참여연대 등 12개 시민단체가 지난해 11월 정부 가이드라인에 따라 빅데이터 사업을 시작한 한국인터넷진흥원 등 4개 기관과 현대차•SK텔레콤•삼성생명 등 기업 20곳을 개인정보보호법 위반 혐의로 검찰에 고발하자 곧바로 사업 계획을 접은 것이다.


한 업계 관계자는 "정부가 시민단체 눈치를 보느라 법 개정은 엄두도 못 내고 가이드라인만 내놓았다가 벌어진 일"이라고 말했다. 과학기술정보통신부 관계자는 검찰 고발 문제와 관련, "기업들이 빨리 결론을 내려 달라고 아우성을 치고 있지만 우리 입장에서도 할 수 있는 게 없다"고 말했다.


█ 한국인 빅데이터는 해외 기업 서버에


21세기 석유로 불리는 데이터는 인공지능(AI), 사물인터넷(IoT), 자율주행차 등 4차 산업혁명의 핵심 자원이다. 하지만 스위스 국제경영대학원(IMD)이 발표한 디지털 경쟁력 순위에서 한국의 '빅데이터 사용 및 활용 능력'은 63국 중 56위로 최하위권이다. IMD는 한국의 빅데이터 활용 능력이 콜롬비아•터키•브라질•페루•멕시코 같은 신흥국보다도 떨어진다고 평가했다. 기술에 대한 규제 강도도 63국 중 44위로 지나치게 과도하다고 분석했다. 기술에 대한 규제 장벽이 낮은 국가일수록 순위가 높다.


실제로 한국 기업들은 개인정보법 등 각종 규제와 인프라(기반) 부족으로 전 세계적인 AI 경쟁에 뛰어들 기회조차 얻지 못하고 있다. 빅데이터 분석 AI를 개발하는 스타트업(초기 벤처 기업) 솔리드웨어는 지난해 개인의 예금 및 금융 자산 현황, 카드 사용 이력, 보험 상품 현황을 모아 AI로 분석해 최적의 금융 상품을 추천해주는 서비스를 개발하려다 포기했다. 현행 신용정보법에서 금융 빅데이터 수집•분석을 원칙적으로 금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빅데이터에 포함된 개개인의 동의를 일일이 받는 경우에만 예외로 허용하고 있지만 스타트업 입장에서는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다.


박재현 솔리드웨어 대표는 "개인정보의 당사자가 누군지 모르게 비(非)식별화된 빅데이터는 기업이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게 규제를 풀어줘야 한다"면서 "이대로 시간이 지나면 중국 알리바바처럼 막대한 자금력과 기술을 가진 글로벌 핀테크 강자들이 국내 시장을 장악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금융 부정 거래를 적발하는 스타트업 더치트는 사기에 활용된 대포 통장 계좌에 대한 빅데이터를 구축했다. 문제가 있는 통장과 연관된 금융거래가 이뤄지면 곧바로 고객에게 '의심 계좌'라고 통보해준다. 하지만 정부는 이 서비스를 허용하지 않고 있다. 계좌 번호가 개인정보에 해당하는 만큼 당사자 동의를 일일이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김화랑 더치트 대표는 "범죄자에게 동의를 받아야 한다는 황당한 규정"이라고 말했다.


█ 미래 산업 핵심 인프라 '클라우드'도 해외 업체가 점령


                                                                           사기가 의심되는 계좌를 알려주는 서비스 더치트. 정부는

                                                                           이 회사가 만든 의심 계좌 빅데이터가 개인정보에 해당한다며

                                                                            서비스를 제한하고 있다. 자료 더치트


인공지능•빅데이터 사업의 핵심 인프라인 클라우드(가상 저장 장치) 분야에 대한 투자도 크게 부진하다. 미국 시장 조사 업체 시너지 리서치그룹에 따르면 지난해 기준으로 10만대 이상의 서버(대형 컴퓨터)를 운영하는 하이퍼스케일(초대형) 데이터센터는 전 세계 390곳에 이르지만 한국은 단 한 곳도 없다. 기업들이 당장 활용하기 힘든 데이터에 비용을 투자하는 데 큰 관심을 두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국내 사용자들이 스마트폰, 소셜미디어 등을 이용하면서 만들어내는 데이터는 구글•마이크로소프트•페이스북 같은 해외 기업들의 서버에 차곡차곡 쌓이고 있다.


국내 클라우드 시장도 이미 아마존•마이크로소프트 등 미국 기업이 장악했고, 국내 대표 IT 서비스 업체들은 아직까지 계열사 데이터를 관리하는 수준에 그치고 있다. 아마존 등 해외 업체들은 단순히 원격 저장 장치를 제공하는 수준을 넘어서 AI로 한국 기업 고객사들의 빅데이터를 분석해 최적의 마케팅 기법과 고객 관리 방안을 제시해준다. 또 맞춤형 AI 소프트웨어 개발과 보안 서비스도 제공한다. 이들에 대한 한국 기업의 의존도가 계속 높아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김창경 한양대 과학기술정책학과 교수는 "한국은 데이터라는 4차 산업혁명 시대의 주권을 이미 외국에 넘겨주고 있는 것"이라며 "우리 국민의 데이터를 해외 기업에 돈을 주고 사와야 하는 일이 곧 벌어질 수도 있다"고 말했다.


█  정부 주도 AI연구소, 정권 바뀌자 '찬밥'


한국 정부는 2016년 이른바 '알파고(AlphaGo) 쇼크' 이후 인공지능연구원(AIRI)을 설립했다. 민•관 합작으로 만들어진 독일 인공지능연구소(DFKI)를 벤치마킹해 정부가 설립을 주도하고 SK텔레콤•삼성전자•LG전자 등 대기업 7곳이 30억원씩 출자했다. 알파고를 통해 인공지능(AI)의 엄청난 위력을 실감한 정부와 기업이 힘을 합쳐서 선진국을 따라잡자는 취지였다.


하지만 정권교체 전후로 AIRI에 대한 정부 지원이 중단됐다. AIRI는 만들 때에도 기술 발전과 미래에 대한 심각한 고민 없이 졸속으로 만들었고 정부가 바뀌면서는 적폐 취급을 받은 것이다. 10~20년 뒤를 보고 해야 할 기술 투자가 정치 논리와 시류에 따라 왔다갔다하는 것이다. AIRI는 당초 계획과 달리 기업으로부터 단기 프로젝트를 수주해 근근이 연명하고 있다. 연구 인력도 처음 계획했던 200명의 10분의 1에 불과해 제대로 된 AI 연구를 할 수 없는 상황이다. 김진형 AIRI 원장은 "정부 주도로 만든 인공지능 연구소가 예산과 인력 모두에서 낙제점 수준"이라고 말했다.


IT(정보기술) 업계에서는 정부의 4차 산업혁명 관련 예산 지원도 지나치게 보수적으로 운영된다는 지적이다. 한 예로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산하 한국연구재단은 지난해 말 AI•빅데이터 분야 '국가 전략과제'를 공모했다.

 당시 연구재단은 "국가가 AI와 빅데이터 분야 신기술 개발을 지원해 4차 산업혁명 시대를 대비하겠다"고 취지를 밝혔다. 선정된 과제에는 최대 5년간 매년 1억~3억원씩의 정부 예산을 지원한다. 하지만 최종 선발된 161곳은 모두 정부 출연 연구소와 대학이었고, 기업이나 스타트업은 단 한 곳도 없었다. 수퍼컴퓨팅 기업 클루닉스 관계자는 "정부 과제에 새로운 기술을 제안하면 실현 가능성이 낮다며 지원하지 않는다"면서 "이런 구태의연한 원칙만 지키면 혁신적인 기술은 나오기 힘들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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