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CO 메카된 싱가포르, 명확한 ICO지침이 비결…법인 설립•컨설팅 등 기본비용만 최소 3억, 암호화폐 현금화 등 사업 구간마다 세금도 내

                                                     게티이미지뱅크


 불확실성은 정치적으로는 그 모호성으로 인해 호재가 될지 모르지만 시장경제에선  악재다. 예측이 불가능 하다는 것은 그만큼 리스크가 커진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시장은 규제든 진흥이든 분명한 시그널이 있으면 거기에 맞게 진화해 나간다. 불확실성과 불투명성은 기업에게 성공은 물론 실패할 기회조차 허락 않는 실기(失機)를 강요한다. 요즘 같은 글로벌 경쟁에선 더욱 치명적인 독이다.


그걸 우리는 5개월 가까이 경험 중이다. 중요한건 아직도 진행형이라는 점이다. 바로 블록체인 산업 얘기다. 관련 법도 없는데 규제는 칼 같다. ICO가 대표적 사례다. 그렇다고 ICO를 하지 않을까? 아니다. 싱가포르 가서 한다. 그러니 싱가포르 배만 불려주는 격이다. 한때 핀테크 강국에서 이제 남에게 구걸하는 신셀로 전락했다. ‘도덕적 정의감’으로 충만한 관료와 정치인들 덕분이다. 문제는 남들도, 다른 나라들도 우리나라 처럼 청교도적 ‘탈(脫) 기술세속주의’에서 벗어났으면 좋겠는데, 미국 중국 일본 유럽을 포함해 세계 각국은 오히려 블록체인 육성에 사활을 걸고 있다.


■ 법도 없는데 규제 칼날…암호화폐 강국서 ICO 구걸신세로 전락


블록체인은 다보스 포럼에서도 4차산업혁명의 핵심기술로 뽑힌 이머징 산업이다.
이미 많은 국가들이 앞다퉈 암호화폐의 자산가치를 인정하기 시작했다. 얼마 전 열린 뉴욕 블록체인 행사엔 1만 명에 가까운 세계 각국의 전문가들이 몰려 시대적 대세임을 보여줬다.


그런데 우리는 이 이머징 산업을 비트코인 가격의 널뛰기 현상 하나만 보고 도박으로 치부하는 우를 범했다. 그 후 정부는 금융권의 계좌 동결을 앞세워 거래소를 옥죄였고, 암호화폐발행(ICO)은 사실상 금지시켜 버렸다.


그 결과 우리는 동남아 둥지를 떠돌면서 ICO를 구걸하는 신세가 됐다. 한때 세계 시장 점유율 20%를 자랑했던 우리가 이젠 급행료까지 주면서 그들의 눈치를 보는 ‘봉’으로 전락한 셈이다. 한국축구와도 같은 답답한 정부의 블록체인 정책이 초래한 ‘적폐’다.


모든 산업 발전이 이머징 초기 버블기를 거쳐 경쟁과 협력으로 점차 정리되고 안정화된다는 평범한 진리를 왜 블록체인 산업에는 적용하지 않았을까. 인터넷 강국으로의 발전과정에서 이미 겪어봤던 우리가 말이다.


 도덕성이 국가의 가장 큰 미덕인지는 짚고 넘어갈 일이다.국가의 미덕은 국부를 창출해 국민들을 배불리 먹이는 일이다. 도덕성을 앞세운 선명성 경쟁은 개인의 미덕으로 더 어울릴 법하다.


지금처럼 소득 주도성장이나 혁신성장이 답이 안나오는 이유도 마찬가지다. 산업과 경제는 말 그대로 경제 용어로 마주서야한다. 그저 레토릭으로 해결할 수 있는 선거용어가 아니라는 말이다. 정치적 수사나 도덕적 수사로 접근할 수 있는 대상도 아니다. ‘무엇’을 가지고 ‘어떻게’ 한다는 분명한 솔루션이 있어야 한다.


■ 싱가포르만 부자만들게 하는 한국의 블록체인 정책


"지금 우리도 여기서 ICO를 하고 있잖아요. 이미 국경 없이 전 세계에서 ICO로 투자를 받고 있는데, 한국 정부에서만 막는다고 막을 수 있나요? 아직도 옛날 사고방식만 가진 정부 때문에 기업들만 2배, 3배로 고생입니다."


전 세계적으로 블록체인 기술에 대한 투자가 활발한 가운데, 암호화폐 발행을 통해 투자금을 모집하는 암호화폐공개(ICO)에 대한 정부의 정책적 지원이 없어 아쉽다는 볼멘소리가 쏟아지고 있다. 특히 한국 기업들도 이미 다른 나라에서 법인을 세우고 ICO에 나서고 있는데 굳이 ICO를 정부가 나서서 막아설 필요가 있느냐는 지적이 설득력을 얻고 있는 것이다.


최근 기자가 싱가포르를 방문하던 중 현지에서 만난 블록체인 기업들과 법무법인 관계자들은 입을 모아 정부의 애매모호한 정책적 태도를 비판했다. 정부가 지난해 9월 '모든 종류의 ICO를 금지한다'고 발표했지만, 정작 어떤 법으로 어떻게 금지하겠다는 후속조치를 취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결국 성급한 정부 당국자의 발언으로 한국 기업들이 한국을 떠나 ICO를 추진하고 있는 상황이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 ICO 나선 韓 기업들, 싱가포르에 수억원씩 세금만 더 내


 특히 기업들은 정부의 눈치를 살피는 모습이 역력했다. 현지에서 인터뷰에 응한 한국 기업 대표들은 모두 기업명과 본인 이름이 언론에 등장하는 것 자체를 원치 않았다. 안그래도 암호화폐에 대해 부정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는 정부인데, 굳이 쓴소리를 하면 사업을 시작하기도 전에 피해를 볼 수 있다는 우려가 커 보였다.


싱가포르에 법인을 세우고 ICO를 성공적으로 마무리한 한 기업 A대표는 "싱가포르에 법인을 세우고 현지 컨설팅을 받는 비용만 최소 2억~3억원은 필요하다"며 "ICO로 모은 자금(암호화폐)으로 사업을 하기 위해 현금화할 때도 싱가포르 법에 따라 세금을 내야 한다"고 했다. A대표는 이 같은 수억원의 비용을 한국이 아닌 싱가포르에 내야 한다는 점이 가장 아쉬운 점이라고 토로했다.


그는 "정부가 정책만 잘 만들어놔도 고용창출(싱가포르에 법인을 내려면 현지 인력 1명을 반드시 고용해야 한다)과 엄청난 세수확보가 가능할 텐데 그런 노력은 없이 귀찮으니까 일단 ICO 금지라고 한 것은 아닐까"라며 "정말 ICO가 문제라고 인식한다면 규제할 근거를 만들었을 텐데 그런 모습도 보이지 않고 있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현지 밋업 행사에서 만난 B대표는 ICO를 위해 싱가포르에서 여러 법무법인과 컨설팅 업체를 알아보고 있다고 했다. 그는 "외국 기업들과 얘기해 보면 한국 기업이 한국에서 ICO를 하지 않고 외국을 돌아다니는 것을 이해하지 못한다"며 "외국 기업들은 한국 투자자들을 만나기 위해 한국을 찾는데, 한국 기업들은 반대로 한국을 나와서 고생을 하고 있는 것"이라고 언급했다.


                지난 5월 싱가포르 현지에서 열린 블록체인 플랫폼 이오스 관련 밋업에 블록체인 업계 관계자들이 참여하고 있다.

                현지에서 열린 밋업이지만 한국 기업과 관계자들도 10명 이상 눈에 띄었다.


현지에서 한국 기업들을 대상으로 컨설팅 사업을 하고 있는 기업의 C임원 역시 한국 정부의 행동을 이해하기 어렵다고 했다. 한국에서는 해외 기업들이 저녁마다 연일 밋업 행사를 열며 한국 투자자를 모집하고 있는데, ICO를 금지한다는 정부는 이런 행사를 다 알면서도 방치하고 있다는 것이다.


C임원은 "싱가포르에 와서 ICO를 하겠다는 기업들이 너무 많은데, 사실 제대로 싱가포르의 ICO 규제도 모르고 오는 경우가 대부분이라 나중에 세금 등의 문제가 발생할까 우려된다"며 "한국에서 명확한 기준을 줬다면 이들이 싱가포르에서 이런 위험을 감수하면서 사업을 할 이유가 없었을 것"이라고 언급했다.


■ 싱가포르를 ICO 메카로 만든 것은 '명확한 규제'


이 같은 여러 기업들의 말처럼 지금 싱가포르는 'ICO 특수'를 누리고 있다. 전 세계에서 싱가포르만큼 ICO를 하기 좋은 국가를 찾아보기 힘들다는 것이 현지 관계자들의 설명이다. 싱가포르의 명확한 ICO 지침이 싱가포르를 'ICO 메카'로 만들어준 것이다.


현지에서 기업들의 ICO를 돕고 있는 법무법인 테일러빈터스의 왕잉유 이사는 "싱가포르에서 ICO를 진행하는 가장 큰 이유는 싱가포르의 규제가 가장 명확하기 때문"이라며 "기업을 컨설팅해주는 변호사 입장에서 모호함이 없다는 점이 싱가포르가 ICO 장소로 선택받고 있는 이유"라고 설명했다.


또 그는 "이미 수많은 투자자들이 블록체인 기술에 투자하고 있으며, 싱가포르 정부도 이 같은 현상을 보고 블록체인 기술을 가진 기업들의 유입을 환영했을 것"이라며 "실제로 몇 달 전만 해도 허술한 프로젝트들도 많았지만 이제는 명확한 가능성을 보여주는 프로젝트가 아니면 성공하기 어렵다"고 진단했다.


특히 그는 정부가 ICO를 막을 명분이 명확하지 않을 것이라고 조언했다. 한국이 막으면 싱가포르에 와서 기업들이 ICO를 하는 것과 같은 사태만 벌어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 그는 ICO를 막는 것이 불가능하다면 일반 투자자들의 피해를 최소화하는 방향으로 규제를 설정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그는 "지금 싱가포르도 개인보다는 기관투자자들이 더 많이 ICO에 투자하고 있으며, 한국 정부도 이 같은 현상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며 "기관투자자들과 같은 투자여력이 높은 기업들이 더 적극적으로 ICO에 참여할 수 있도록 만들어 주면 일반투자자들도 참고해서 피해를 줄일 수 있지 않겠느냐"고 했다.


■ '교각살우' 꿈꾼다면 희망이 없다


지금도 늦지 않았다 블록체인 산업은 혁신성장에 가장 부합되는 아이템이다. 우리가 세계시장도 주도해 봤고 점차 개별산업으로 이식돼 진화중이라는 점을 눈여겨 봐야한다.


이제부터라도 세금 이슈와 투자자 보호를 위한 최소한의 가이드라인만 만들어 지켜봐주는 게 정부가 할 일이다. 그리고 차근차근 거래소 정책은 어떻게 할 것인지, ICO 정책은 어떤 로드맵으로 허용할 것 인지를 세밀하게 고민하면 된다. 그 와중에 자금원이 투명하지 않거나 범죄를 저지르면 그때그때 처벌하면 된다.


그렇지 않고 소문처럼 이제 선거도 끝났으니 눈치 볼 것 없이 무조건 때려잡자는 식의 교각살우(矯角殺牛)를 아직도 꿈꾸고 있다면 더 이상 희망은 없다. 업체 살생부나 만들며 창업, 취업 지원을 핑계로 원하지 않는 곳에 돈이나 퍼주는 구태라면 기대할 게 없다. 국민의 먹고사는 문제가 기득권이나 정치적 잣대로 여전히 재단된다면 우리의 미래는 없다. 우리를 둘러싼 상황이 그 정도로 한가하지 않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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