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겨울 얼어붙은 대동강 위, 평양의 옛 정취를 그리워하며 말아먹던 메밀국수 한 그릇. 그 전설 같은 풍경이 남쪽 한켠 의정부에서 되살아난다. 1·4후퇴 무렵 피란 내려온 평양 출신 노장이 지난 1969년 연천에서 문을 열고 이후 1987년 의정부로 옮겨온 이곳 '평양면옥'은 반세기 넘는 세월 동안 변함없는 맛으로 손님을 맞이해 온 1세대 평양냉면의 산증인이다. 맑고 담담한 육수와 메밀면의 조화라는 평양냉면의 본령을 지키면서도, 의정부만의 개성을 담아 한국 평양냉면 계보에서 가장 큰 줄기를 이룬 전설적인 노포다.

◇ 평양냉면의 뿌리, 의정부에서 시작되다
평양냉면을 논할 때 이집을 빼놓을 수 없는 이유는 바로 평양면옥이 한국 평양냉면 계보의 본산이라 불릴 만큼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기 때문이다. 한국전쟁 이후 남하한 실향민들에 의해 곳곳에 뿌리내린 평양냉면집들 가운데서도, 이 집은 가장 많은 분파를 형성하며 전통을 이어왔다. 창업자인 고(故) 김경필 옹은 원래 평양의 보절정 근처 보실면옥 출신으로, 6·25 전쟁 때 고향을 떠나 남한에 내려왔다.
전쟁이 한창이던 1950년대 후반부터 미군부대가 있던 연천에서 가족들과 음식 장사를 시작했고, 지난 1969년 '평양면옥'이라는 이름으로 첫 냉면집을 연 것이 지금의 의정부 평양면옥 계열 시초가 됐다. 이후 1987년에 의정부 경문당 골목 인근 현재 위치로 식당을 이전하며 본격적으로 이름을 알렸고, 의정부에서 시작한 평양냉면 맛이 입소문을 타고 서울까지 퍼져 나가게 된다.
특히 창업주의 자녀들이 대를 이어 평양냉면 가업을 확장한 것이 유명한 일화다. 맏아들은 의정부 본점 운영을 물려받아 가게를 지켰고, 딸들은 서울 충무로 일대에 진출해 각기 냉면집을 열었다. 첫째 딸이 연 필동면옥과 둘째 딸이 운영한 을지면옥은 모두 서울 평양냉면계를 주름잡는 대표 노포로 자리매김했다.
셋째 딸 역시 서울 강남구 잠원동에 '의정부 평양면옥' 분점을 내어 남쪽 지역 미식가들까지 사로잡았고, 현재까지도 운영을 이어가고 있다. 이렇듯 의정부파 평양냉면 일가는 서울 도심 냉면 세계의 패권을 쥐게 됐고, 세대를 거쳐 식당들을 일구며 전국 냉면 마니아들의 성지가 됐다.
오늘날 한국의 평양냉면 맛을 이야기할 때 의정부 계열과 장충동 계열, 그리고 우래옥이나 을밀대 같은 독자파를 빼놓을 수 없다. 그 중에서도 의정부 평양면옥은 의정부파의 시초로서, 그 계보를 따라 형성된 냉면집들의 맛의 원형이라 할 수 있다. 맑은 고기 육수에 약간 간이 된 스타일, 고춧가루와 파를 올리는 고명, 그리고 돼지고기 제육을 곁들이는 문화까지 의정부파의 공통된 철학이자 전통이 된 셈. 물론 시대에 따라 기호가 변하고 업소마다 세부 레시피는 다르지만, '담백한 육수와 메밀면'이라는 정통 평양냉면의 본령만큼은 변치 않고 지켜오고 있다.
이러한 원칙이 있기에 의정부든 장충동이든 족보에 이름을 올린 노포들은 서로 경쟁하면서도 함께 전통의 가치를 이어가는 동반자들로 여겨진다. 실제로 평양냉면 애호가들은 전국의 평양냉면 집들을 마치 순례하듯 찾아다니며 육수의 온도, 면발 굵기, 고명 배치까지 세심하게 비교하고 기록한다. 그만큼 한 그릇 냉면 속에 깃든 오랜 역사와 철학을 존중하기 때문일 것이다.
평양냉면은 살짝만 조리법이 달라져도 맛의 결이 크게 달라지는 예민한 음식이라서, 분점조차도 본점 맛을 똑같이 내기가 어렵다고들 한다. 그런데 이 집은 50여 년 넘는 세월 동안 '처음 그 맛'이라는 찬사를 들을 만큼 뚝심 있게 옛 방식을 고수해왔다. 좋은 재료 선별과 끓이는 시간, 메밀 반죽 비율과 면 뽑는 기계의 압력까지 수십 년간 다져온 노하우 덕분에, 매일같이 찾아오는 옛 단골들도 한 자리에서 변함없는 맛을 이어오고 있는 것 자체에 찬사를 보내고 있다.

◇ '냉면에 웬 고춧가루?'였는데,,바이블이 된 맛
본격적으로 자리에 앉아 음식을 받아들면 붉은 고춧가루가 톡톡 뿌려진 의정부식 냉면이 반갑게 맞아준다. 살짝 불투명하지만 맑은 육수, 정갈하게 자리잡은 가는 면, 무짠지, 삶은 돼지고기와 소고기 수육, 그리고 달걀 고명, 송송 썬 파와 화룡점정 고춧가루까지. 기대를 안고 육수를 맛보면 슴슴할 것이라는 예상과 달리 은은한 감칠맛이 남는 육향과 살짝 느껴지는 짠맛이 조화롭다. 실제로 이 집은 소고기와 돼지고기를 함께 우려내어 국물을 낸다고 하는데, 그런만큼 차가운 고깃국을 연상시킬 정도로 진한 육향이 배어 있다. 투명하리만치 맑은 국물 속에서 풍겨나오는 육향에서 오는 역설적인 매력이 입 안 가득 퍼지며, 단정한 첫인상 뒤의 숨은 힘을 드러낸다.
평양냉면집이라면 오이나 무절임, 배추김치 국물 등을 곁들이기도 하지만, 이 의정부 계열 냉면에는 대파 썬 것과 새빨간 고춧가루가 살짝 흩뿌려져 있다. 언뜻 '냉면에 웬 고춧가루?'인가 싶지만, 차갑게 식힌 고깃국 같은 육수에는 이 매콤한 가루 양념이 의외로 잘 어울린다. 실제로 의정부 계열 냉면집들의 트레이드마크가 바로 이 무심한 듯 올라간 고춧가루. 국물을 후루룩 마실 때 딸려오는 파를 씹을 때마다 느껴지는 파 향도 인상적이다. 이렇듯 의정부 평양면옥의 고춧가루와 파는, 맑은 육수에 약간의 알싸한 포인트를 주며 담백함에 활력을 더해주는 숨은 조연이다.
면발은 다른 냉면집에 비해 가느다란 굵기가 특징인데, 직접 뽑은 면을 한 젓가락 들어올리면 메밀 특유의 은은한 곡향이 코끝에 스친다. 쉽게 툭툭 끊어져서 입 안에서 거칠게 저항하지 않고 술술 넘어간다. 메밀 향이 아주 진하게 확 올라오는 편은 아니지만, 오히려 담백한 육수와 어울려 조화로운 풍미를 낸다.

함께 즐길만한 사이드 메뉴로는 돼지고기 삶은 수육과 소고기 삶은 수육이 있다. 인기는 돼지고기가 좀 더 많은 편. 주문과 동시에 썰어 촉촉하고 따뜻한 고기는 정갈하면서도 수분감이 살아있다. '반접시' 주문도 가능해서 좋다. 걸쭉한 특제 양념장을 찍어 맛보면 입맛을 돋워주는 역할을 톡톡히 한다.

◇ 밋밋한 냉면? 평범함의 이면
서울 도심에도 내로라하는 냉면 명가들이 많지만, 의정부 평양면옥만의 아스라한 매력은 분명 존재한다. 혹자는 이 집 냉면이 평범하다고도 말한다. 하지만 평범하게 느껴진다는 그 말 속에는, 오히려 이 집이 평양냉면의 한 원형으로서 오랫동안 자리를 지켜왔다는 반증이 담겨 있다. 평양면옥에서 뻗어나간 여러 갈래의 냉면집들이 저마다 개성을 덧붙이며 변화를 거듭한 덕분에, 한국의 냉면집들이 어느정도 상향 평준화됐고 그에 따라 되려 원형의 모습이 수수해진 것. 업그레이드된 냉면을 접한 이들에게 이 집의 맛이 밋밋하게 느껴진다면, 그것은 이곳이 평양냉면을 처음 선뵀던 1세대이기 때문이고, 그만큼 긴 시간 변함없이 맛의 일관성을 유지해왔다는 뜻이기도 하다.
변화무쌍한 세상 속에서도 노포의 맛은 시간을 거슬러 우리에게 말을 건넨다. 누군가에게는 평범한 이 육수와 면발은 누군가에게는 추억을 소환하는 재료가 된다. 처음 평양냉면을 접하는 이에게도, 수십 년간 단골로 드나든 이에게도, 이 집은 늘 같은 자리에서 같은 맛으로 기다리고 있다. 북녘 고향의 그리움을 품은 투명한 육수처럼, 세월이 흘러도 변치 않는 한 그릇의 정직한 맛. 평양면옥은 오늘도 그 자리에 묵묵히 앉아, 우리의 오감을 통해 시간과 추억의 향기를 전해주고 있다. 이것이야말로 반세기를 넘게 이어져 온 노포의 힘이자, 평양냉면 한 그릇이 주는 가장 큰 감동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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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호: 평양면옥
▲ 주소: 경기도 의정부시 평화로439번길 7
▲ 식신 별등급: 3스타
▲ 영업시간: 화~토 11:00-20:20, 매주 일요일·월요일 휴무
▲ 추천메뉴와 가격: 냉면(물/비빔) 1만4000원, 돼지고기수육 2만4000원, 소고기수육 2만8000원
▲ 식신 '현우아빠'님의 리뷰: 평양냉면의 어머니라고 해서 가보았습니다. 아직은 평냉을 알아가는중입니다. 점점더 익숙해지면서 깊어져 갑니다. 맛보았던 평냉중 재일 맛나네요. ㅎㅎ 암튼 더 노력해보겠습니다.~~^^

/안병익 식신 대표이사
2022~2024년 한국푸드테크협의회 공동회장
2017.07.~2022년 5월. 한국푸드테크협회 협회장
2010년 5월~식신 대표이사
2015년~한국인터넷전문가협회 이사
2012~2019년 중앙대학교 산업창업경영대학원 겸임교수
2010~2017년 건국대학교 정보통신대학원 겸임교수
